콘텐츠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기 황후가 元 패망 촉발? 궁정 실권자였다는 방증

기 황후가 元 패망 촉발? 궁정 실권자였다는 방증

[중앙선데이] 입력 2013.12.15 02:25 / 수정 2013.12.15 02:25

고려사의 재발견 기 황후와 원나라 순제

글자크기 글자 크게글자 작게
경천사 10층 석탑. 개풍군 광덕면 광수리에 있었다. 개항기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가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중앙포토]
고려인 출신 기(奇) 황후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1333∼68년 재위)의 제2비(1340년)를 거쳐 정후(正后:1365년)가 된다.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은 황태자(1353년)로 책봉된다. 기 황후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는 제후인 영안왕(榮安王)에 봉해진다. 그녀의 일족이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 된 것은 기 황후가 힘을 쏟은 궁중정치의 결실이다.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과 결합해 원나라와 대(對)고려 외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 여인(※기 황후)이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황실 법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식자(識者)들은 천하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庚申外史』)

“감찰어사 이필이 상소했다. ‘기씨가 황후가 된 후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하천이 범람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도적이 번성했다. 음(陰:기 황후)이 성하고 양(陽:순제)이 쇠미한 현상입니다. 기씨를 황후에서 비(妃)로 낮추어야 재변이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원사』 본기)

기씨가 정후로 된 지 수년 만에 원나라가 망한다. 이 때문에 위 기록과 같이 그녀는 원나라 쇠망의 책임까지 뒤집어쓴다. 오히려 위 기록은 기 황후가 당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원나라 쇠망의 잘못을 뒤집어 쓴 기 황후
기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기 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貢女) 출신이다. 고려 처녀들이 강제로 징발되는 처참한 모습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사방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여 여자를 숨기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했다.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수백 집을 뒤진다. 이러기를 한 해에 한두 번 혹은 2년에 한 번씩 하며, 한 번에 많을 경우 40, 50명을 뽑는다. 뽑힌 여자의 부모와 종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기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었다.”(『고려사』 권109 이곡 열전)

원나라에 처녀를 바치기 위해 처녀들의 국내 혼인을 금지한 1275년(충렬왕 1)의 기록이 공녀(貢女)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후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가장 많은 숫자를 보낸 때는 동녀(童女:처녀) 53명과 화자(火者:거세된 환관) 23명을 보낸 1320년(충숙왕 7)이다. 명문가의 처녀를 요구했고, 딸을 숨기거나 바치지 않은 관리들은 유배 같은 처벌을 받았다. 기 황후의 고조부는 최충헌 정권 때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음서로 관료가 되어 수령을 지냈다. 그녀 역시 공녀의 조건에 들어맞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2) 6월 즉위한 순제는 이해 9월 권력자 연철목아(燕鐵木兒)의 딸 답납실리(答納失里)를 정후(正后)로 맞이한다. 기 황후는 이해 12월 고려 출신 환관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된다. 이후 곧 순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는다. 이 때문에 정후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다.

“기씨(祁氏:기황후·祁는 奇와 同音)는 성품이 지혜롭고 영리해(慧黠) 황제(※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는 권신(權臣)의 딸이라 교만했고 나이 어린 황제를 얕보았다.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불평하여 하루 저녁도 거르지 않고 매일 회초리로 그녀를 때렸다. 또 무릎을 꿇게 해 죄를 추궁하고, 그녀의 몸을 불로 지지기도 했다.”(『庚申外史』)

문종(文宗:순제의 삼촌)이 죽자 연철목아는 문종의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의 반대로 순제의 배다른 동생 영종(寧宗)이 즉위했으나 2개월 만에 죽는다. 연철목아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는 즉위한다. 그러나 순제는 원하지 않은 혼인에다 자신을 얕보는 황후 대신 기 황후에게 더 마음을 쏟았다.

1335년 6월 순제 폐위 역모사건을 주도한 연철목아와 그 아들 당기세 형제가 살해되고, 답납실리 황후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기 황후에겐 좋은 기회였다. 기 황후를 정후로 맞이하려 한 순제의 뜻과 달리 1338년 3월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해 온 홍길자(弘吉刺) 가문의 백안홀도(伯顔忽都)를 정후로 받아들인다. 대신 1340년 3월 기 황후는 제2 황후로 책봉된다. 그러나 정후 백안홀도는 명목상의 제1 황후에 불과했다.

제2 황후 된 1340년 이후 정국을 요리
기 황후는 이때부터 권력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1346년(충목왕 2) 8월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순제의 숙모)가 순제를 폐하고 아들 연첩고사(燕帖古思)를 즉위시키려고 모의했다는 이유로 모자는 축출된다. 당시 비난의 화살은 기 황후와 그 세력, 즉 기당(祁黨)을 겨냥하고 있었다.

“(祁黨은) 상을 주어야 할 곳에 상을 주지 않고 형벌을 주어야 할 곳에 형을 주지 않아 상벌이 균형을 잃어 기강이 이때부터 크게 무너졌다. 중원의 도적은 이때부터 일어났다.”(『草木子』 권3의 상)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실권을 행사한 1340년부터 중국 대륙에선 한족(漢族)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원나라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기록은 반란의 원인을 기 황후 일당이 상벌의 원칙을 무너뜨린 문란한 정치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1340년대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당시 원나라 궁정의 실권자임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1353년 6월 기 황후의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猶識理達獵)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정후(正后)의 아들이 있는데도 기 황후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기 황후는 마음대로 정치를 요리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찾을 만한 것이 없었다. 1365년 7월 기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하고 정후 백안홀도의 아들을 태자로 앉히려는 발라첩목아(孛羅帖木兒)의 반란이 진압된다. 이어 정후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해 12월 기 황후는 제1 황후가 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원나라 멸망 3년 전이었다. 기 황후의 품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기황후는) 일이 없으면 여효(女孝:孝經의 일종?), 경전 및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고 역대 황후 가운데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보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신을 시켜 태묘에 보내 먼저 제사를 올린 후에야 그것을 먹었다.”(『원사』 열전)

기록에 따르면 기 황후는 미모뿐 아니라 교양이 풍부하고 지적으로 세련된 여인이었다. 순제가 그녀에게 혹할 만했다. 순제는 술을 마시거나 연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와 천문 관측을 잘했으며 장편 시를 남길 정도로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표현력의 소유자였다. 순제는 유약한 호문(好文)의 군주에다 권력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기 황후는 순제의 이런 점을 이용해 궁중에서 권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장안사. 기 황후의 원찰. 6·25전쟁 때 소실됐다. [사진 간송미술관]
자정원, 궁중정치의 핵심 기구
1340년 12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자 원나라는 황후의 각종 비용을 전담하는 재정기구로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한다. 자정원은 3개 현(縣)과 2개 주(州)의 21만4538호가 소속되어, 그곳에서 거둔 조세로 운영되었을 정도로 재정규모가 상당히 큰 기구였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정국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기 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기용해 자정원을 운영했다. 최고책임자인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전주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기용했다. 기 황후의 고향인 행주(幸州) 출신의 환관 박불화(朴不化)도 자정원 소속이었다. 둘은 자정원을 관리하면서 황후의 명령을 받아 각종 정치에도 관여했다. 또한 황제의 원찰 해주 신광사(神光寺)와 기 황후의 원찰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와 개경 경천사(敬天寺)에 대신 불공을 드리려고 고려에 자주 왔다. 그들은 고려에 머물면서 고려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고용보는 개경 경천사에 10층 석탑을 제작했다. 이 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처녀를 데려다 양육시켜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기 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서울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庚申外史』)

1341년 이후의 시기는 기 황후가 제2 황후로 있을 때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많은 고려 여인을 길러 원나라 고위 관료에게 첩으로 보냈다. 고려 여인을 첩으로 두어야 명문가로 행세할 수 있고, 황실의 시중 드는 여인의 태반이 고려 여인이라는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기 황후는 그 지위 때문에 정국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 환관에 의존한 궁중정치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훗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나라 쇠망기에 정국을 주도하다 보니 그녀가 망국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자신과 일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도 그런 비난을 증폭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고려의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프린트 메일로보내기 내블로그에 저장